요한복음 7:37-39 "명절 끝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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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절 끝 날”
“명절 끝 날”
“명절 끝 날”
(NKRV)
37명절 끝날 곧 큰 날에 예수께서 서서 외쳐 이르시되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38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 하시니
39이는 그를 믿는 자들이 받을 성령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예수께서 아직 영광을 받지 않으셨으므로 성령이 아직 그들에게 계시지 아니하시더라)
Intro
청년들의 특송이 사랑스럽죠? 간절한 마음으로 마음껏 찬양을 드릴 수 있게 해주신 하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오늘밤은 다음세대의 물꼬를 틀 청년금요철야로 함께 드립니다. 주실 말씀을 통해 피차 은혜를 받고 다음세대를 위해 함께 기도하는 시간이 되시길 소망합니다.
함께 보실 말씀은 말씀입니다. 짧은 본문이니까요? 한 목소리로 합독 하시겠습니다.
저는 이 본문 말씀을 준비하며 묵상하는 가운데 청년들의 모습을 그려보았습니다. 곧 8월 13-15일까지 청년수련회가 있습니다. 제가 근래 들었던 수련회에 대한 청년들의 소리는 기대보다는 기대하지 않음의 소리가 더 컸습니다.
비단 우리 교회만의 현실은 아닙니다. 대한민국에 청년부가 있는 모든 교회들의 고민일 것입니다. 좀 더 어떻게 교회로부터 멀어져가는 그들을 잡을 수 있을까? 많은 방법론들이 등장했습니다. 이미 미국에서는 이머징처치라는 형태로 설교 강대상을 치우고 연극과 같은 퍼포먼스가 설교를 대신하고 구도자들의 마음을 사로잡기 위해 애쓰는 예배의 패러다임을 몰고 왔습니다. 즉 예배의 주인이 하나님이 아니라 사람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분별없는 일부 한국교회들이 모방하기 시작했고 이미 정착되었습니다.
사역자로서 거룩한 예배의 모습들이 사라져가는 것이 가슴이 아프기도 합니다. 또한 그것이 옳다라고 여기는 청년들이 그 넓은 길로 향할 때 더더욱 가슴이 아픕니다.
어느 순간 우리는 예배의 자리에 자연스럽게 테이크 아웃 잔에 담긴 커피를 손에 들고 있지는 않습니까? 예배가 극장관람이 된 것이죠. 하나님 앞에서 부끄러운 모습임에도 두려워하거나 경건하지 못함을 느끼지 못하는 시대입니다.
물론 수련회의 주제인 출애굽기에 맞춰 통독을 열심히 하는 청년들이 있다는 사실이 그리고 매주 금요일 밤에 교리 스터디에 꾸준히 주님의 주신 진리를 알고자 나아오는 청년들이 있음에 감사합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하나님과 참된 교제를 나누지 못하는 청년들이 있음에 청년교구 사역자로써 외면 할 수는 없습니다.
오늘 말씀은 이 자리에 나온 성도 여러분에게도 해당되는 말씀이지만, 저는 특별히 갈 바를 알지 못하는 탈진의 상태에 놓인 청년들이 이 말씀을 통해 회복의 역사가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이루어지길 간절히 소망합니다.
그리고 더더욱 주님과 깊은 교제를 원하는 성령 충만한 삶이 무엇인지 알기 원하는 청년들 또한 오늘 말씀의 대상임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저는 이번 수련회에 청년들이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임하는지 알고 싶습니다. 연례 행상로 여기시나요? 아니면 어떠한 간절함이 있습니까?
“빅터 프랭클린”이 쓴 ‘죽음의 수용소’라는 책을 들어보셨거나 읽어 보셨을 것입니다. 저는 늘 심리학을 전적으로 신뢰하지 않기에 늘 취사선택을 하고자 합니다. 그 책에서도 역시나 취사선택한 내용이 있습니다.
‘죽음의 수용소’ 나치 치하의 수용소에서 살아남은 사람은 어떤 사람일 것 같으세요? 생존에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신체적인 특별함도 지적인 우수성도 연령도 성별도 아닌 삶의 의미를 아는 자가 살아남는 다는 것을 그 책을 통해 알게 되었습니다.
보다 더 이해하기 쉬운 기독교적인 관점으로 바꾸어 말씀드리면 “영혼의 상태를 바르게 아는자가 살아 남는다”고 할 수 있습니다.
청년이라면 특별히 세례 받은 성도라면 프로의식이 있어야 합니다. 프로가 무엇입니까? 아마추어와 다른 점이 무엇인가요?
본문을 통해 우리 자신을 진단해 보고 주님이 주신다고 약속하신 것을 사모하여 이전과는 다른 하나님이 더욱 기뻐하시는 청년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소망합니다.
Ⅰ. 명절 끝날
오늘 본문을 보니까? 명절 끝날 곧 큰 날이라고 합니다. 7장 2절 보면 이 시기가 초막절임을 알 수 있습니다.
히브리인들에게는 3대 절기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3대 절기를 기억하고 지키라고 출 23장, 레위기 23장에 말씀하셨습니다. 유월절, 맥추절, 초막절입니다.
오늘 본문에 나온 절기인 초막절은 유대력으로 7월 15-22일까지 7일간 나뭇가지들과 종려나무 가지들로 초막을 만들어 하나님의 언약궤가 안치되어 있던 성막 주변에 살았던 광야의 삶을 기억하는 절기입니다. 8일째는 대회로 모든 사람들이 모여 실로암 못에서 떠온 물이 단에 부어지면 이제 초막절에 모였던 모든 무리가 각자의 집으로 돌아가는 그 시점이 오늘 본문입니다.
그런데 이 큰 절기에 많은 사람들에게 있어 기쁘고 감사가 넘쳐야 하는데 온전하지 못한 모습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왜냐면 예수님의 외침 속에 그들의 진짜 모습이 투영되었기 때문입니다. 어떤 모습이었을까요?
함께 본문 37절 말씀 읽겠습니다.
(NKRV)
37명절 끝날 곧 큰 날에 예수께서 서서 외쳐 이르시되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초막절이 행해지는 장소는 예루살렘입니다. 영적으로 하나님의 나라를 의미했고, 예배의 중심지를 의미합니다. 그런데 그곳에는 제사장, 서기관, 사두개인, 바리새인이라는 소경과 같은 자들이 선생 노릇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들로부터 초막절 내내 아무것도 얻지도 못하고 집으로 돌아갈 채비를 하는 사람들을 예수님이 보시지 않았을까요?
초막절의 의미를 말씀 드렸죠, 이 초막절에 모인 사람들은 무엇을 갈망하고 나왔을까요? 저는 그들이 광야에 있던 조상들이 보았을 것을 상상하며 나왔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성막 주변 초막에 살면서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는 빽빽한 구름이 성막 위에 드리워지면 출애굽 했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했습니다. 그 구름을 보고 하나님의 임재를 느꼈고 함께하심을 구름을 통해 알았습니다.
신약에 와서 초막절을 지키고자 했던 많은 사람들이 기대했던 것은 그러한 하나님의 임재가 아니었을까요? 신비적이고 놀라운 초자연현상을 통한 그러한 임재를요, 갈급한 청년들을 만나면 대부분 그와 같은 이미지 언어에만 몰두 합니다.
주일에도 청년들에게 말씀 드렸는데, 오늘날 문자 언어에 익숙한 세대가 아니라 이미지 언어에 친숙한 세대입니다. 그래서 자신의 눈으로 확인하고 증명되어야 믿는 세대가 되었습니다. 그러니 문자 언어로 대표되는 이 성경과 친숙하지 않습니다. 문자 언어는 보고 읽고 들어야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미지 세대는 각종 동영상이나 사진으로 봐야 믿는 세대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영이신 하나님이 눈에 보이지 않으니 안 믿어요.
연례행사처럼 교회 나오지만 왜? 갈급한지 아세요? 하나님은 인격적으로 여러분에게 말씀으로 다가 오시는데 자꾸 육신의 눈으로 확인하고자 하기 때문입니다.
초막절에 나아왔지만, 허무하고 허전한 마음가운데 영적으로 메말러 있는 무리들을 보시고 그때 예수님은 서서 외치셨습니다.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예수님은 강력한 이 선포를 명령형으로 말씀하셨습니다.
여러분 성경에 누가 이런 선포를 했습니까? 모세도 세례요한도 그 누구도 한시대에 크게 쓰임 받았던 선지자들 조차도 이런 선포를 하지 못했습니다.
내게로 오라고 하실 수 있다는 것은 그 분이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약속된 구원자이시라는 것입니다.
Ⅱ. 위대하고 준엄한 선포
청년들이 교회 밖에서 열심히 사는 것을 압니다. 직장에서든 학교에서든 때론 PC방에서 졸린 눈을 비비며 시간가는 줄 모르고 열심히 레벨 업을 하는 것도 압니다. 때론 썩어질 왕관들을 얻기 위해 얼마나 치열하고 격렬하게 살아갑니까? 그런데 반면 우리는 우리의 영생에 대해 얼마나 고민하고 생각하십니까?
예수님께서 보셨던 진짜 목마름은 무엇이었겠습니까? 그들의 영혼의 상태였습니다. 영혼의 목마름이었습니다.
우리 구주 예수님은 하나님으로부터 단절된 자들을 초청하십니다.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누가? 이 초청의 소리에 귀를 기울 수 있습니까? 제가 서두에 말씀드린 어떤자가 살아 남습니까?
“영혼의 상태를 바르게 아는자가 살아 남는다”
현대를 살아가는 많은 사람들은 자신의 영혼의 상태를 잊고 삽니다. 왜일까요?
말씀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NKRV)
17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 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는도다
세상에서 누리는 신분과 지위와 부가 오히려 여러분의 진짜 상태를 못 보게 할 수 있습니다. 초막절에 모여든 사람들 중에는 어쩌면 현세의 삶이 물질적으로 풍요로워 자신의 영혼의 처지를 까마득하게 잊고 사는 사람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주님이 보시기에 그들은 메마른 영혼을 소유한 자들이었습니다.
하나님을 안다하지만 하나님을 믿는다 하지만 엉뚱한 곳에 가서 그 목마름을 채우고자 했습니다. 성전에서 어저면 빽빽한 구름이 임하기를 원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목마름의 갈증에 있는 자들에게 친히 인격적으로 찾아 오셨습니다.
함께 읽겠습니다.
(NKRV)
14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구주이신 예수님을 말씀하시는 것이지요! 그 분이 우리 가운데 거하셨다고 합니다. 거하시매의 동사는 “스케노” 원뜻을 보니까? 텐트를 치고 거하다는 것입니다. 구약에서 성막 주변에서 텐트치고 살았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보았던 구름이 아니라 이제는 성육신하셔서 이 땅에 예수님이 직접 오셔서 죄와 불의의 고통 속에 스스로 삶의 길을 개척하려다 탈진에 빠진 자들에게 친히 오셨습니다.
자신의 비참함 상태를 알고 그 소리에 귀 기울이여 나오는 자들에게 예수님이 계속하여 말씀하십니다.
Ⅲ. 생수의 강
함께 읽겠습니다.
(NKRV)
38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 하시니
우리의 영혼의 목마름을 알고 나오는자들이 예수님을 믿을 때 주신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게 하신다고 합니다.
히브리인들은 배가 마음의 위치가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일반적인 사고로는 가슴에 위치했다고 하죠. 히브리인들의 사고에는 배에 사람의 중심 마음이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배라고 하신 것입니다.
목마른 자들이 예수님께 나아오고 예수님으로부터 마신 자들의 배에서 나오는 이 생수의 강을 39절에서 말씀해 주십니다. 그것이 뭐하고 하십니까?
39이는 그를 믿는 자들이 받을 성령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예수께서 아직 영광을 받지 않으셨으므로 성령이 아직 그들에게 계시지 아니하시더라)
네 성령을 가르켜 말씀하신 것입니다.
“명절 끝 날”
(NKRV)
37명절 끝날 곧 큰 날에 예수께서 서서 외쳐 이르시되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38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 하시니
39이는 그를 믿는 자들이 받을 성령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예수께서 아직 영광을 받지 않으셨으므로 성령이 아직 그들에게 계시지 아니하시더라)
Intro
청년들의 특송이 사랑스럽죠? 간절한 마음으로 마음껏 찬양을 드릴 수 있게 해주신 하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오늘밤은 다음세대의 물꼬를 틀 청년금요철야로 함께 드립니다. 주실 말씀을 통해 피차 은혜를 받고 다음세대를 위해 함께 기도하는 시간이 되시길 소망합니다.
함께 보실 말씀은 말씀입니다. 짧은 본문이니까요? 한 목소리로 합독 하시겠습니다.
저는 이 본문 말씀을 준비하며 묵상하는 가운데 청년들의 모습을 그려보았습니다. 곧 8월 13-15일까지 청년수련회가 있습니다. 제가 근래 들었던 수련회에 대한 청년들의 소리는 기대보다는 기대하지 않음의 소리가 더 컸습니다.
비단 우리 교회만의 현실은 아닙니다. 대한민국에 청년부가 있는 모든 교회들의 고민일 것입니다. 좀 더 어떻게 교회로부터 멀어져가는 그들을 잡을 수 있을까? 많은 방법론들이 등장했습니다. 이미 미국에서는 이머징처치라는 형태로 설교 강대상을 치우고 연극과 같은 퍼포먼스가 설교를 대신하고 구도자들의 마음을 사로잡기 위해 애쓰는 예배의 패러다임을 몰고 왔습니다. 즉 예배의 주인이 하나님이 아니라 사람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분별없는 일부 한국교회들이 모방하기 시작했고 이미 정착되었습니다.
사역자로서 거룩한 예배의 모습들이 사라져가는 것이 가슴이 아프기도 합니다. 또한 그것이 옳다라고 여기는 청년들이 그 넓은 길로 향할 때 더더욱 가슴이 아픕니다.
어느 순간 우리는 예배의 자리에 자연스럽게 테이크 아웃 잔에 담긴 커피를 손에 들고 있지는 않습니까? 예배가 극장관람이 된 것이죠. 하나님 앞에서 부끄러운 모습임에도 두려워하거나 경건하지 못함을 느끼지 못하는 시대입니다.
물론 수련회의 주제인 출애굽기에 맞춰 통독을 열심히 하는 청년들이 있다는 사실이 그리고 매주 금요일 밤에 교리 스터디에 꾸준히 주님의 주신 진리를 알고자 나아오는 청년들이 있음에 감사합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하나님과 참된 교제를 나누지 못하는 청년들이 있음에 청년교구 사역자로써 외면 할 수는 없습니다.
오늘 말씀은 이 자리에 나온 성도 여러분에게도 해당되는 말씀이지만, 저는 특별히 갈 바를 알지 못하는 탈진의 상태에 놓인 청년들이 이 말씀을 통해 회복의 역사가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이루어지길 간절히 소망합니다.
그리고 더더욱 주님과 깊은 교제를 원하는 성령 충만한 삶이 무엇인지 알기 원하는 청년들 또한 오늘 말씀의 대상임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저는 이번 수련회에 청년들이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임하는지 알고 싶습니다. 연례 행상로 여기시나요? 아니면 어떠한 간절함이 있습니까?
“빅터 프랭클린”이 쓴 ‘죽음의 수용소’라는 책을 들어보셨거나 읽어 보셨을 것입니다. 저는 늘 심리학을 전적으로 신뢰하지 않기에 늘 취사선택을 하고자 합니다. 그 책에서도 역시나 취사선택한 내용이 있습니다.
‘죽음의 수용소’ 나치 치하의 수용소에서 살아남은 사람은 어떤 사람일 것 같으세요? 생존에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신체적인 특별함도 지적인 우수성도 연령도 성별도 아닌 삶의 의미를 아는 자가 살아남는 다는 것을 그 책을 통해 알게 되었습니다.
보다 더 이해하기 쉬운 기독교적인 관점으로 바꾸어 말씀드리면 “영혼의 상태를 바르게 아는자가 살아 남는다”고 할 수 있습니다.
청년이라면 특별히 세례 받은 성도라면 신앙과 믿음에 있어 프로의식이 있어야 합니다. 프로가 무엇입니까? 아마추어와 다른 점이 무엇인가요?
본문을 통해 우리 자신을 진단해 보고 주님이 주신다고 약속하신 것을 사모하여 이전과는 다른 하나님이 더욱 기뻐하시는 청년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소망합니다.
Ⅰ. 명절 끝날
오늘 본문을 보니까? 명절 끝날 곧 큰 날이라고 합니다. 7장 2절 보면 이 시기가 초막절임을 알 수 있습니다.
히브리인들에게는 3대 절기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3대 절기를 기억하고 지키라고 출 23장, 레위기 23장에 말씀하셨습니다. 유월절, 맥추절, 초막절입니다.
오늘 본문에 나온 절기인 초막절은 유대력으로 7월 15-22일까지 7일간 나뭇가지들과 종려나무 가지들로 초막을 만들어 하나님의 언약궤가 안치되어 있던 성막 주변에 살았던 광야의 삶을 기억하는 절기입니다. 8일째는 대회로 모든 사람들이 모여 실로암 못에서 떠온 물이 단에 부어지면 이제 초막절에 모였던 모든 무리가 각자의 집으로 돌아가는 그 시점이 오늘 본문입니다.
그런데 이 큰 절기에 많은 사람들에게 있어 기쁘고 감사가 넘쳐야 하는데 온전하지 못한 모습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왜냐면 예수님의 외침 속에 그들의 진짜 모습이 투영되었기 때문입니다. 어떤 모습이었을까요?
함께 본문 37절 말씀 읽겠습니다.
(NKRV)
37명절 끝날 곧 큰 날에 예수께서 서서 외쳐 이르시되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초막절이 행해지는 장소는 예루살렘입니다. 영적으로 하나님의 나라를 의미했고, 예배의 중심지를 의미합니다. 그런데 그곳에는 제사장, 서기관, 사두개인, 바리새인이라는 소경과 같은 자들이 선생 노릇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들로부터 초막절 내내 아무것도 얻지도 못하고 집으로 돌아갈 채비를 하는 사람들을 예수님이 보시지 않았을까요?
초막절의 의미를 말씀 드렸죠, 이 초막절에 모인 사람들은 무엇을 갈망하고 나왔을까요? 저는 그들이 광야에 있던 조상들이 보았을 것을 상상하며 나왔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성막 주변 초막에 살면서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는 빽빽한 구름이 성막 위에 드리워지면 출애굽 했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했습니다. 그 구름을 보고 하나님의 임재를 느꼈고 함께하심을 구름을 통해 알았습니다.
신약에 와서 초막절을 지키고자 했던 많은 사람들이 기대했던 것은 그러한 하나님의 임재가 아니었을까요? 신비적이고 놀라운 초자연현상을 통한 그러한 임재를요, 갈급한 청년들을 만나면 대부분 그와 같은 이미지 언어에만 몰두 합니다.
주일에도 청년들에게 말씀 드렸는데, 오늘날 문자 언어에 익숙한 세대가 아니라 이미지 언어에 친숙한 세대입니다. 그래서 자신의 눈으로 확인하고 증명되어야 믿는 세대가 되었습니다. 그러니 문자 언어로 대표되는 이 성경과 친숙하지 않습니다. 문자 언어는 보고 읽고 들어야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미지 세대는 각종 동영상이나 사진으로 봐야 믿는 세대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영이신 하나님이 눈에 보이지 않으니 안 믿어요.
연례행사처럼 교회 나오지만 왜? 갈급한지 아세요? 하나님은 인격적으로 여러분에게 말씀으로 다가 오시는데 자꾸 육신의 눈으로 확인하고자 하기 때문입니다.
초막절에 나아왔지만, 허무하고 허전한 마음가운데 영적으로 메말러 있는 무리들을 보시고 그때 예수님은 서서 외치셨습니다.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예수님은 강력한 이 선포를 명령형으로 말씀하셨습니다.
여러분 성경에 누가 이런 선포를 했습니까? 모세도 세례요한도 그 누구도 한 시대에 크게 쓰임 받았던 선지자들 조차도 이런 선포를 하지 못했습니다.
내게로 오라고 하실 수 있다는 것은 그 분이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약속된 구원자이시라는 것입니다.
Ⅱ. 위대하고 준엄한 선포
청년들이 교회 밖에서 열심히 사는 것을 압니다. 직장에서든 학교에서든 때론 PC방에서 졸린 눈을 비비며 시간가는 줄 모르고 열심히 레벨 업을 하는 것도 압니다. 때론 썩어질 왕관들을 얻기 위해 얼마나 치열하고 격렬하게 살아갑니까? 그런데 반면 우리는 우리의 영생에 대해 얼마나 고민하고 생각하십니까?
예수님께서 보셨던 진짜 목마름은 무엇이었겠습니까? 그들의 영혼의 상태였습니다. 영혼의 목마름이었습니다.
요한복음에서 구주 예수님은 유월절이 가까이 왔을 때 오천 명을 먹이셨고, 물위를 걸으셨으며, 자신의 백성을 위해 한량없이 공급하시는 분이셨습니다. 그리고 초막절에는 예수님께서 성전에서 가르치시며 참되신 생수로 자신을 말씀하셨습니다.
우리 구주 예수님은 하나님으로부터 단절된 자들을 초청하십니다.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하나님의 구원 행동은 성전이라는 건물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실제적이며 인격적으로 행동하십니다.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누구든지 와서 마시라”!
누가? 이 초청의 소리에 귀를 기울 수 있습니까? 제가 서두에 말씀드린 어떤자가 살아 남습니까?
“영혼의 상태를 바르게 아는자가 살아 남는다”
현대를 살아가는 많은 사람들은 자신의 영혼의 상태를 잊고 삽니다. 왜일까요?
말씀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NKRV)
17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 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는도다
세상에서 누리는 신분과 지위와 부가 오히려 여러분의 진짜 상태를 못 보게 할 수 있습니다. 초막절에 모여든 사람들 중에는 어쩌면 현세의 삶이 물질적으로 풍요로워 자신의 영혼의 처지를 까마득하게 잊고 사는 사람도 있었을 것입니다.
하나님을 안다하지만 하나님을 믿는다 하지만 엉뚱한 곳에 가서 그 목마름을 채우고자 했습니다. 성전에서 어쩌면 빽빽한 구름이 임하기를 원했을지 모릅니다. 다시한번 말씀드리지만 하나님의 구원 행동은 건물이라는 성전에 있지 않았습니다.
왜? 하나님께서 초막절을 지켜 행하라 했겠습니까? 구름이 아닌 실제적인 임재! 성육신하셔서 친히 이 땅에 오셔서 우리의 목마름 죄와 사망의 권세라는 우리의 영혼의 상태의 비참함을 친히 알려주시고 구원의 유일한 길이 구주되심을 알려주시고자 그 절기를 지키라고 한 것입니다.
함께 읽겠습니다.
(NKRV)
14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구주이신 예수님을 말씀하시는 것이지요! 그 분이 우리 가운데 거하셨다고 합니다. 거하시매의 동사는 “스케노” 원뜻을 보니까? 텐트를 치고 거하다는 것입니다. 구약에서 성막 주변에서 텐트치고 살았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보았던 구름이 아니라 이제는 성육신하셔서 이 땅에 예수님이 직접 오셔서 죄와 불의의 고통 속에 스스로 삶의 길을 개척하려다 탈진에 빠진 자들에게 친히 오셨습니다.
자신의 비참함 상태를 알고 그 소리에 귀 기울이여 나오는 자들에게 예수님이 계속하여 말씀하십니다.
Ⅲ. 생수의 강
함께 읽겠습니다.
(NKRV)
38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 하시니
예수님의 초청에 반응하는 한 가지는 믿음입니다. 그렇습니다. 그 소리에 믿음으로 반응해야 목마름이라는 비참한 우리의 상태에서 삶의 의미를 바라보게 합니다.
죄와 죽음을 극복하는 것은 구주 예수님의 초청에 믿음으로 나아가는 길 밖에 없습니다. 우리의 영혼의 목마름을 알고 나오는자들이 예수님을 믿을 때 주신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게 하신다고 합니다.
히브리인들은 배가 마음의 위치라고 생각했습니다. 일반적인 사고로는 가슴에 위치했다고 하죠. 히브리인들의 사고에는 배에 사람의 중심 마음이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배라고 하신 것입니다.
목마른 자들이 예수님께 나아오고 예수님으로부터 마신 자들의 배에서 나오는 이 생수의 강을 39절에서 말씀해 주십니다. 그것이 뭐하고 하십니까?
39이는 그를 믿는 자들이 받을 성령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예수께서 아직 영광을 받지 않으셨으므로 성령이 아직 그들에게 계시지 아니하시더라)
네 성령을 가르켜 말씀하신 것입니다.
Ⅳ. 삶의 진짜 의미
여러분 예수님을 믿는 자들이 받게 될 것이 성령이라고 하셨습니다. 오늘 본문의 시점은 우리 구주 예수님이 영광을 받으시기 전이셨습니다. 그 영광이 무엇입니까? 십자가에서 우리 죄를 위해 죽으시고 부활하셔서 죄와 사망의 권세로부터 최종승리하신 것이지요.
왜? 예수님께서 그 믿는 자들에게 목마름이 해결된 자들에게 성령을 주실까요? 그 성령을 생수의 강으로 흐른다고 하셨을까요?
:8을 함께 읽겠습니다.
(NKRV)
8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사랑하는 여러분 성령을 소유하는 사람은 절대 혼자만의 신앙과 믿음 생활을 하지 않습니다. 어떠한 인생을 사나요? 말씀처럼 예수님의 증인된 인생을 살아갑니다. 생수의 강이 흐르는 것은 타자에게 영향을 주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어떠 영향입니까?
영적인 목마름에 대해서 영혼에 대해서 관심을 갖게 하는 것입니다.
제가 35살에 예수님을 만나서 처음 변한 것은 미경이라는 여자에 대한 저희 변화였습니다. 미경이와는 뭘 해도 맞지 않고 의견 충돌이 일어나기 일쑤였고, 영원히 그런관계가 지속될 것 같았습니다. 미경이가 누구냐? 저희 친누나예요.
저는 누이의 아픔과 영혼의 갈급함을 보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제가 예수님을 만나고 성령을 선물로 받으니 인생의 가치관과 기도의 내용이 달라지더라구요.